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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경향신문 펌
2004/1/1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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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왕릉 있는 평강 삼방협의 전설 [한국사 미스터리]궁예묘 있는 평강 삼방협의 전설
[속보, 생활/문화] 2004년 01월 12일 (월) 18:51
강원 평강에서 안변으로 향하는 경원선 길목에 삼방협(三防峽)이란 지명이 나온다. ‘上·中·下防’을 합한 말인데 북방의 적을 막은 천혜의 협곡이다. 얼마나 험한지 기차가 이곳을 지날 때는 화차를 앞 뒤에 달아 지그재그로 오르내릴 정도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 지도인 ‘청구도’를 보면 바로 이 삼방협, 그것도 ‘중방’에 궁예왕의 묘가 분명히 표시돼있다. 1924년 최남선이 쓴 ‘풍악기유(楓嶽記遊)’를 보자.
“삼방개울을 끼고 남으로 오리쯤 가면 조그만 전우(殿宇)가 보이는 것은 태봉의 궁대왕을 숭봉한 곳인데~ 그 당우(堂宇) 뒤로 돌담같이 보이는 것은 석축 봉분의 남쪽 면이요, 그 북서 양면은 고제(古制)가 온전하고….”
최남선은 궁예왕의 무덤흔적을 본 것이다. 그렇다면 궁예는 정사(삼국사기·고려사)의 기록처럼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까.
“여러 장수들이 태조(왕건)를 옹위하고 문을 나섰다. 기다리던 사람들이 1만여명에 달했다. 왕(궁예)은 ‘나의 일은 끝났구나’ 하며 미복으로 갈아입고 암곡(巖谷)으로 도망하여 이틀밤을 머물렀는데 허기가 심하여 보리이삭을 몰래 끊어먹다가 부양(斧壤·평강)사람들에게 죽임을 당했다.”(고려사)
하지만 삼방 주민들이 전하는 전설은 이렇듯 비참한 ‘타살’이 아니라 천명이 다했음을 알고 감행한 의연한 ‘자살’이다.
“구레왕(궁예)은 삼방골짜기로 들어왔다. ~~먹을 것을 찾고 몸을 숨겨 재기할 땅을 둘러보는데 어떤 중이 나타나~이 병목 같은 속에 들어와 살길을 찾는 것이 어리석다하자~(궁예가) 아아 천지망아(天之忘我·하늘이 나를 잊었다는 뜻)로다 하여 봉우리에서 심연을 향해 몸을 던졌는데~우뚝 선 채로 운명했다. 선 채로 금관(金棺)을 만들고~.”(풍악기유)
그런데 궁예왕은 죽어서도 삼방지역의 화복을 지배하는 신(神)으로 받들어진다. 여기서 궁예가 구레왕, 즉 고려(고구려)왕으로 일컬어졌다는 것은 특기할 만하다. 물론 정사(正史)를 놔두고 전설을 믿는다는 것은 무리가 있다. 하지만 역사란 승자의 기록. 패배자는 암군(暗君), 패륜아로 그려질 수밖에 없다. 민간전설은 바로 그런 정사의 허점을 보완해줄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지금도 북한땅 삼방협에 남아있을 궁예왕릉. 남북교류의 상징으로 삼아 제일 먼저 이 왕릉을 공동조사하면 어떨까.
〈이기환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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