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예대왕이여! 한탄강을 보호하소서 【鐵原】후삼국시대 태봉국을 세운 궁예왕의 성품이 포악했다는 사실(史實)과 상반된 내용이 담긴 기행문이 발견돼 관심을 끌고 있다.
12일 박종용 철원군문화재전문위원은 “최근 구입한 육당 최남선선생의 `풍악기유(楓嶽記遊)'에는 일제시대 태봉국의 도읍지였던 철원읍 홍원리일대에 대규모 궁예왕릉과 영정이 보존된 전각, 능지기 등이 있었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며 “궁예왕이 백성들에게 존경을 받지 않았더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인 만큼 재조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육당이 1926년께 철원일대를 방문한뒤 쓴 것으로 보이는 풍악기유에는 `弓大王(궁예왕)을 봉숭한 태봉전우(泰封殿宇)에는 금관홍포한 화상을 봉안하고···중략···고래로 영검이 특저하여 거민의 외경이 자별해 평강, 안변주민들이 봄 가을 치성을 드린다'는 내용이 있다.
또 `태봉궁이 곧 궁왕릉의 묘각임을 들어 알고 그 당우 뒤로 보이는 돌담이 실상 석축 봉분의 남일면이요 올라가 보면 그 북서면은 고제(古制)가 온전하고 동일면은 수십보 원방한 영역이 고색을 띠어 엄존함을 본다'고 남겨 왕릉이 웅장했음을 후세에 전했다.
특히 고려사가 `궁예왕이 음란·사치하며 가렴주구를 일삼은 미치광이 군주로 평강부근 보리밭에서 설익은 보리를 훔쳐먹다가 농민에게 비참하게 최후를 맞았다'고 기록한데 반해 지역주민의 말을 빌려 궁궐근처의 깊은 연못에 몸을 던져 우뚝 선채로 운명했다고 전하고 있다.
박위원은 “풍악기유에는 궁예왕이 운명한 자리에 금관을 씌운후 능이 만들어졌고 금관을 훔치려는 사람들이 수차례 큰 재난을 당하는 등 이 지역의 독자신(獨子神)이 되었다고 기록돼 있다”며 “궁예왕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으나 민초들에게 사랑을 받은 것이 확실하다”고 주장했다.
철원군은 오는 28, 29일 이틀동안 전적관에서 궁예왕의 역사적 위치를 재조명하기 위한 제3차 태봉학술제를 개최한다.<李正國기자·jklee@kw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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