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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탄강댐 건설반대 철원군대책위원회 [자유게시판]
     
 
이름: 최종철
2003/10/18(토)
요동백 김응하장군의 애국심 2.  

○역대 포충사 원장
※현종 7년(서기 1666년) 사우가 건립되면서 초대원장부터 조선조말까지의 원장 명단은 문헌이
없어 기록치 못하였으며 일제시부터 현대까지의 원장의 명단만 순서대
로 열기한다.
1. 李錫瑩(이석형) 2. 金駜濟(김필제) 3. 高運河(고운화) 4. 尹秉周(윤병주) 5. 許 根(허 근) 6. 金景
瑞(김경서) 7. 李泰潤(이태윤) 8. 安敎愼(안교신)  9. 安敎壽(안교수)10. 金允煥(김윤환)11. 金潤植
(김윤식)12. 朴鳳圭(박봉규)  13.朴正錫(박정석)14. 金知律(김지율)15. 安俊鎬(안준호)16. 金圭章
(김규장  



▣ 遼東伯 金應河將軍 廟庭碑(요동백 김응하장군 묘정비) pp1536~1539.

○지정번호 : 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제105호
○지정일자 : 서기 1985년 9월 13일자
○위 치
①원 위 치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278번지(역촌동)(동경 127。13‘ 북위 38。14’)
②임시위치 : 육군 제3군사령부 연병장(1974년 2월 3일)
③현 위 치 :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번지(1984년 4월 3일) - (동경 127°13‘ 북위 38° 14’)
○규 모 : 고 250㎝, 두께 33㎝   碑臺石(비대석) ~ 거북(대형) 조각받침(380㎝ × 283㎝)
○재 료 : 비석~비신~烏石 屋蓋石(오석 옥개석)~화강암석. 臺石(대석)~복련을 한 장방형 화강
암석
○건립연대 : 崇禎己酉(숭정기유) 6월 立(입, 조선 현종 10년(1669) 6월 제작). 숙종 9년(1683)에
건립.
○소유 및 관리 : 국유(향교재단)

--遼東伯(요동백) 金應河將軍(김은하 장군)의 廟庭碑(묘정비)는 조선조 광해군(1619) 때 명나라
建州衛(건주위)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하여 조선 원군의 조영장으로 출정하여 이름을 떨친 충무공
김응하 장군의 무훈과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숙종 9년(1683)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향교골(전
철원부 서화전리 일봉산 밑 역촌동)에 세운 기념비이다.
--화강암의 석재를 사용하여 정면을 응시한 거북이 조각받침을 한 위에 250㎝의 높이와 폭 98㎝,
두께 33㎝의 사면 비석으로 일대기를 현종 10년(1669) 6월 尤菴 宋時烈(우암 송시열, 좌의정)의 글
과 사헌부 지평 朴泰維(박태유)의 글씨에 영의정 文谷 金壽恒(문곡 김수항)의 書題字(서제자)를
곁들여 제작하였다.
--당초에는 화지리 향교골 褒忠詞(포충사)에 함께 있었으나 6.25의 전화로 인하여 褒忠祠宇(포충
사우)는 소실되고 碑(비)만 남아 있었다. 그러나 이 고장 출신으로 육
군 제3군사령관이었던 李世鎬(이세호) 장군이 1974년 2월 사령부 연병장으로 이전 보호중 1984년
4월 3일 철원의 儒生(유생) 및 철원군수의 노력으로 원위치에서 남쪽으로 2㎞ 떨어진 曲巖山(곡암
산) 기슭인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산1-1번지에 봉안하였다. (별첨 비문 번역문)

--그후 1986년(10월 17일~11월 4일) 부지정리 423평, 잔디 이식 153㎡, 석축 236.5m 묘정비 보호
망 30m, 잣나무 75주를 식재하여 주변 공사를 시행하였으며 1990년(7
월 30일~10월 26일)에 褒忠祠宇(포충사우 : 26.32㎡)를 철원군(군수 曺圭榮)에서 4,300만원의 예
산을 들여 1991년 3월 28일 준공하기에 이르렀다.

■忠武公 廟庭碑 銘誌(충무공 묘정비 명지)
--포충사묘정비는 서기 1683년 기해 10월에 尤菴 宋時烈(우암 송시열) 선생 謹撰(근찬) 이조 숙
종 9년 화지리 278번지 書院(서원)마을에 건립 관민이 每歲春秋(매세춘추) 음 2월 8월 中丁日(중
정일) 奉享參祀(봉향참사) 추모하다가 6.25동란으로 祠宇(사우)는 燒失(소실)되고 묘정비는 황량
한 초야에 묻혀 훼손 위기에 처한 것을 제3군사령관의 배려로 3군사 연병장에 移安(이안)하여 전
군에 교본으로 삼았었다.
이에 철원군 儒生員(유생원)의 간절한 염원과 철원군수의 탁월한 노력으로 환원케 되었으나 원위
치 복귀가 불가능함에 유생들의 희생적인 出捐(출연)으로 화지리 산1번지 1호 현 위치의 ○지 1,0
00평을 매입하고 우선 복원하는 바이다.
- - - - - - - - - - - - - - - - - - - -서기 1984년 갑자 4월 3일
- - - - - - - - - - - - - - - - - - - -포충사 복원사업 추진위원회
- - - - - - - - - - - - - - - - - - - -철원군수 전 동 빈
- - - - - - - - - - - - - - - - - - - -철원향교전교 김 지 율
- - - - - - - - - - - - - - - - - - - -추진위원 안 준 호
- - - - - - - - - - - - - - - - - - - -추진위원 김 규 장
- - - - - - - - - - - - - - - - - - - -충무공종손 김 재 홍

■褒忠詞廟庭碑(포충사묘정비) 左議政 尤菴 宋時烈 撰(좌의정 우암 송시열 찬)

                         (부사공 19대손 재원 역)

--신종황제 46년 만력 무오년(서기 1618년)에 건노(여진족 후금으로 뒤에 청이라 함)가 반하여 크
게 천촉과 요○지방(현재 성도 중경 부근과 요동 북경 부근일대)의 군병을 발하고 도독 유정과 유
격장군 교일기를 보내 정벌케 하고 우리나라에 청병하니 조선에서 2만명의 군사를 동원하여 강홍
립으로 원수를 삼고 김경서로 부원수로 삼아 유 교 이장과 힘을 합하여 밤을 낮삼아 적을 치게 하
니 이때 장군은 선천군수로 좌영병을 거느리고 경서군에 예속되었다. 이듬해 기미년 2월 21일 요
하를 건너 虜地(노지)에 들어가 부차령에 이르니 때에 황제가 연로하여 내관(내시)이 정무에 참여
하고 전선에서는 전군의 행렬이 계속되지 못하고 또 모든 부대가 각자 공을 다투어 경진하다 패하
니 部督(부독)은 스스로 목을 매어 죽고 아군이 드디어 虜(노)와 더불어 충돌케 되니 장군은 수하
병 3천명을 이끌고 말을 달려 앞으로 나가 지휘하여 진을 벌릴 때 신기가 평상시와 같이 안휴하며
진이 이마 이루어지매 홍립에게 고하여 말하되 속히 우영장군 이일원에게 명하여 힘을 아울러 마
저 싸우게 하라. 홍립이 우영장군 이일원으로 하여금 우영병을 이끌고 서로 돕게 하니 장군이 일
원에게 이르기를 아군이 세약하니 험한 곳을 택하여 지형 지물을 이용치 않으면 반드시 패하리라
일원이 불응하였다. 적 수천기가 좌우영사이를 횡단하니 일원은 달아나고 조금있다 적 6만이 우
리 군병앞 1리밖에 진을 칠새 정예로 뽑아 적의 앞으로 진격하여 장군이 명하여 포수로 전례를 삼
고 일시에 총을 쏘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적병이 퇴각하기 세 번에 이르렀다. 이때에 교 유격
장군이 패하여 홍립진에 있다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귀국위 보졸이 철기와 더불어 평지에서 당함
이 능히 이와 같도다. 갑자기 큰 바람이 불어 연기와 먼지가 4면에 차서 총과 활을 쏠 수 없게 되어
(당시의 총은 火繩銃(화승총)으로 화승에 부시로 불을 대려서 쏨 큰 바람이 불면 쏠 수 없음)
적이 이에 힘을 다하여 돌격해 오니 아군이 순간에 무너졌으며 이때 장군은 손에 활을 들고 허리
에 칼을 차고 홀로 류수하에 의지하니 두 군졸이 가지않고 한사람은 기를 잡고 한사람은 화살을
받들어 (김철현이 甲裏(갑리)에서 箭矢(전시) 300개를 바치고 장군과 同死(동사)를 원하다) 장군
이 활을 쏘니 백발백중 맞고 맞으면 반드시 두세놈을 꾀장하니 적의 시체가 堆肥(퇴비)처럼 쌓이
고 오랑캐의 귀한 장수가 많이 죽은 고로 적이 몹시 두려워 하였다. 장군이 중갑을 입었는데도 화
실 꽂힌 것이 마치 고슴도치 같았으나 능히 뚫으지는 못하였다.
--화살이 이미 다 떨어져 드디어 칼로 적을 치니 一劍之下(일검지하)에 앞놈의 투구 쓴 대가리와
뒷놈의 갑옷 입은 허리가 割然(할연)이 아울러 떨어지니 그 소리가 산이 무너지는 것 같고 칼이 이
르는 곳에 적병이 殲滅(섬멸)이라 이에 앞서 홍립이 譯官(역관) 河世國(하세국)을 노진에 보내 항
복할 뜻을 전함으로 虜(노)가 급히 장군에게 사람을 보내니 대저 화친을 권유코져 함이었다. 장군
이 불응하고 크게 홍립을 꾸짖어 말하기를 너의 무리는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리고 서로 돕지
않는다. 칼이 또한 부러지매 빈주먹으로 치니 오히려 奮(분)이 스스로 더하였다. 一賊(일적)이 뒤
로 돌아 멀리서 창를 던지어 비로소 서서 운명함을 알았으니 이때가 바로 3월 초 4일이었다.
--오히려 칼자루를 꽉쥐고 노한 안색이 勃勃(발발)하여 풀어지지 않으니 적이 놀래어 서로 돌아보
며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교 유격장군이 또한 자살하고 홍립 경서 일원 등은 다 갑옷을 벗
고 虜酋(노추)에게 항복하니 이때 양진의 시체를 장사하니 장군은 홀로 썩지 않고 칼자루를 오히
려 그 손에 굳게 쥐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영의정을 증직하고 사당을 龍灣江(용만강 : 압록강)상
에 건립하고 廟庭(묘정)에 비를 세우고 유가족을 보살피게 하였다.
그 아우 응해가 형이 평상시 착용하던 의복으로 용만강상에 招魂(초혼)하고 (초혼시 “나 여기 나
간다. 어서 가자”하는 장군의 음성이 낭낭하였다는 전설이 있음) 돌아와 그 의복으로 철원 선영하
에 장례하니 그때 문인들이 다투어 挽狀(만장)을 썼다. 이듬해 경신년에 신종황제께서 거룩한 詔
書(조서)를 보내고 벼슬을 증하여 요동백을 봉하고 유가족에게 백금을 하사하며 장군의 충절을 사
람에게 계몽하는 등 대단히 행사가 놀라왔으며 그 사실이 충렬록(忠烈錄)에 다 기재되었고 그 후
潛谷(잠곡) 金相國(김상국)이 장군에 관한 사기와 전기를 수집하여 상하권(忠烈錄)을 작성 편입하
였다. 국조명신록에 장군의 신장이 8척이요 언어가 적었으며 蓋世(개세)의 기품으로 음주가 數斗
(수두)에 이르러도 志氣(지기)가 어지럽지 않고 용력이 절륜하여 18세시에는 맹호를 맨손으로 잡
았는데 이때부터 시골 사람들이 장군이라고 별명을 불렀다. 또 금전을 탐내지 않음이 흙을 보는
것 같이하고 색을 피하기를 怨讎(원수)같이 하니 참된 호걸이요 위대하고 굳센 대장부라고 하겠
다.
--집에 있을 때는 부모에게 효하고 동기간에 우애하고 14세되든 해에 부모가 돌아가셨는데 임란
중에 돌아가셔서 장지를 구하지 못하던 중 異僧(이승)이 지나가다가 그 슬퍼함을 보고 장지를 택
하여 장사케 하였는데 그 그 장제의 예절이 비록 經生學士(경생학사)라도 이 보다 더 잘할 수가 없
었다. 弟(제) 應海(응해)와 같이 힘써 농사를 짓고 낮이면 사냥하고 밤이면 병서를 공부하였다. 관
찰사가 크게 철원에서 무사를 소집하여 재주를 시험하였는데 그 때 장군의 나이 극히 어렸으나 문
득 활을 쏠 때마다 과녁을 맞추니 관찰사가 매우 기특하게 여겨 무과보기를 권하여 마침내 급제하
였고 萬曆(만력) 乙巳科에 다시 선전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 이득과 손실 우대와 천대에 관심이 없
어 항상 마음이 담담하였다. 白沙(백사) 李恒福(이항복)이 특별히 변방 수령으로 천거하여 임지
로 떠날 때 貴家女(귀가녀)를 소개하는 자가 있었는데 이 때 장군이 사절하며 말하기를 그 여자를
처와 동등으로 대우하면 명분이 紊亂(문란)할 것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반드시 처보다 우
대함을 바랄 것이다. 하고 頑强(완강)이 거절하였다.

--장군이 장년시에 선조상을 당하였는데 그때 군중에 聲技繁華(성지번화)한 중에도 주색을 멀리
함이 엄하였으며그 몸가짐과 행동을 절제함은 근엄하였다. 효종대왕 때에 弟(제) 應海(응해)가 或
逆獄(혹역옥)에 연락이 있지 않았나 의심받은 일이 있었는데 왕께서 此人(차인)은 응하의 弟(제)
이며 일찍이 병자호란 때에 군병이 패하니 스스로 목을 찔러 亂屍中(난시중)에 기절한 것을 구출
하여 소생한 일이 있는 사람인데 반드시 나라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라 하여 즉석에서 북병사를 제
수하였다. 대저 광해조 때에는 의리가 밝지 못하였으나 장군에 대하여는 감히 欽尙(흠상 :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는 등 행사를 말함)을 아니하지 못하였고 戎虜(융노)에 이르러서도 또한 장군의 충
절에 탄복하였다.
--천자께서 惻然感動(측영감동)하여 이미 기재한 바 褒寵(포총 : 포는 표충(表忠), 총은 寵愛(총
애)이 훌륭하였고 我朝(아조)에서는 역대왕의 旌褒事業(정포사업)이 극진하니 이는 前古(전고)에
도 드믄 일이다. 崇禎(숭정) 정묘년에 장군을 모신 龍灣廟(용만묘)를 청나라가 헐어달라는 요청
에 의하여 비와 함께 건물을 철거한 고로 今上王(금상왕) 병오년에 金應敎萬均(김응교만균)이 철
원부사 당시에 비로소 廟屋(묘옥)을 지어 忠魂(충혼)을 편안히 모시게 되었고 당시 군수 世龜(세
구)와 병사 柳斐然(류비연)은 장군의 내외손인데 비를 세움에 있어 비문을 청해 옴에 기록하기를
대저 장군에 대하여 논평컨대
--장군의 絶倫勇力(절륜용력)으로 弓馬(궁마 : 무관)에 종사하였는데 적은 일에도 항상 勤愼하여
家道(가도)가 매우 바른 즉 그 근본이 또한 확립되었고 출신하여 官(관)이 있으면서도 待遇(대우)
의 優劣(우열)에 관심을 갖지 않았으며 美童(미동) 官妓(관기) 官婢(관비) 등을 멀리하였다. 그 修
身(수신)함이 또한 확고하였고 갑자기 대적을 만나 일만군병이 魂飛魄散(혼비백산)하여도 침착하
게 진을 치고 몸을 던져 적을 무찌르니 그 용력이 또한 크다. 적이 화친을 청하여 왔어도 듣지 않
고 마침내 전사하니 그 의리가 또한 바르다.
삼군을 激動(격동)시켜 적을 향하여 다투어 전사하고 한사람도 발길을 돌려 물러서는 자가 없었
은 즉 가히 삼군의 死力(사력)을 얻었다 하겠다. 柳河(류하)에 의지하여 적을 쏘고 화살이 떨어지
면 칼로치고 칼이 부러지면 주먹으로 치니 가히 百夫(백부)의 防禦(방어)가 되었다.

전사 후 오히려 칼을 쥐고 안색이 산 사람같았고 시신이 오래토록 썩지 않았으니 그 충절하고 굳
센 혼백이 또한 가히 죽엄을 따라 없어지지 읺고 영구히 남아 있으리라. 그러나 이 문장이 장군의
위대함을 표현함에 부족하도다. 오직 君臣有義(군신유의) 父子有親(부자유친)의 大倫(대륜)과 천
지간에 차있는 호연한 의기가 한데 뭉쳤으니 이른바 국민으로서 떳떳한 자라 하겠노라.

우리나라가 皇朝(황조)와 같이 3백년을 내려오며 신종황제에 이르러 壬亂時再造之恩(임란시재조
지은)으로 말할 진대 의리로는 비록 형제지간이나 친 부자와 다를 바 없으니 우리나라 전국토의
一草一木(일초일목)에 이르기까지 帝德(제덕)이 힘을 입지 않은 자 없건마는 저 홍립 경서는 감
히 밀지 운운하여 大義(대의)를 저버리고 逆(역)에 從(종)하여 我東方禮義之國(아동방예의지국)
으로 하여금 禽獸(금수)의 지경에 빠지게 하였으니 장군의 전사가 없었더라면 장차 천하후세에 무
슨 말로 從征之義(종정지의 : 원병을 파견진의)를 변명하리요.

그러면 장군의 전사는 천하의 大義(대의)를 밝혔고 천하의 大經(대경)을 세웠으니 日月(일월)이
떨어지지 않으면 그 기운이 滅(멸)하지 않고 山岳(산악)이 무너지지 않으면 그 節槪(절개)가 없어
지지 않고 河海(하해)가 마르지 않으면 그 功(공)이 이지러지지 않으니 하늘이 장군을 이 세상에
生(생)케 함은 단 우리나라뿐 아니라 천하만세를 위함이요 춘추대경에 주황실을 높이고 夷狄(이
적)을 배척하든 공맹의 사상을 재실천케 함이니 天(천)이 이미 장군에게 生(생)을 주었은 즉 하늘
이 또한 생을 거둠이라.

혹자는 홍립이 구원치 않아 장군이 전사하였다고 원망하나 홍립의 힘이 어찌 장군의 만고충절에
도움이 되리요 장군의 諱(휘)는 應河(응하)요 자는 景羲(경희)니 조상 때에 안동에서 철원으로 이
주하였으니 경순왕의 후손이요 고려 명장 方慶(방경)은 11대조가 된다.
부친은 증호조참판 地四(지사)요 萬曆(만력) 8년경진3월초3일에 탄생하고 40세되던 해 3월초4일
에 전사하니 廟(묘)는 철원부 보개산 동쪽 화전리와 선천, 종성, 창성에 있다. 崇禎(숭정) 乙酉(을
유) 6월 일(서기 1669년)


▣ 忠武公 金應河將軍의 神道碑(충무공 김응하장군의 신도비) pp1661~1662.

○소 재 지 : 철원군 동송읍 하갈리 여우산(군량봉)(동경 127。5‘ 북위 38。16’)
○건립연대 : 광해군 11년(서기1619년) 9월 27일 立(입)
○규 모 : 높이 150㎝, 폭 55㎝
○재 료 : 烏石(오석)

○ 神道碑(全面文)<신도비(전면문)>
--有明 朝鮮國 贈 大匡輔國 崇祿大夫 議政府 領議政兼 平安道 助防將 贈 忠武金公 應河之墓(유명
조선국 증 대광보국 숭록대부 의정부 영의정겸 평안도 조방장 증 충
무김공 응하지묘)

--조선 선조 13년(1580)에 철원군 어운면 하갈리에서 태어났다. 고려시대의 명장 方慶(방경)의 후
손이며 8척의 장신에 힘이 장사였다고 한다.

--선조 37년(1604)에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 북우후 등을 거쳐 광해군 10년(1618) 명의 원병 요
청으로 부원수 金景瑞(김경서)의 조방장으로 출전했다가 다음 해 도원수 姜弘立(강홍립)의 좌영
장이 되어 압록강을 건너 後金國軍(후금국군)과 富車嶺(부차령)에서 대전하다가 명나라 도독 유
정(劉綎)은 패전하여 자결하고 조선군 우영장 이일원(李一元)은 전세가 불리하여 달아나니 홀로 3
000의 군사를 이끌고 적 6만과 대전하다가 갑자기 큰 바람으로 시야가 가리어 총과 활을 쏠 수 없
게 되어 아군이 순식간에 무너지자 장군이 홀로 칼과 활을 가지고 버드나무에 기대어 싸우니 장군
의 화살에 적의 시체가 쌓이고 많은 적장이 죽으니 적들이 크게 두려워 했다.
이때에 전세의 불리함을 깨달은 강홍립이 항복하고 장군에게도 항복할 것을 종용하자 장군이 크
게 꾸짖기를 “너희 무리는 목숨을 아껴 나라를 저버린다.” 하며 장군의 화살이 다 떨어지자 칼로
싸우고 칼이 부러지자 맨주먹으로 최후의 일각까지 싸우다 전사하니 그날이 광해군 11년(1619) 은
력 3월 4일(양력 4월 13일)이였으며 장군의 나이 40세였다.

--광해군 12년(1620)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시호는 충무공이라 내렸으며 명나라 신종으로부터 요
동백에 추서되었다.

--형의 슬픈 전사 소식을 전해 들은 아우 응해(應海)는 형이 출정할 때 도강하였던 창성으로 가서
압록강 건너 쪽을 향하여 형의 적삼을 흘들며 혼백을 불렀다.
응해는 형의 혼백을 모시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광해군 11년(1619) 4월 27일 비변사는 광해군께
김장군을 고향에서 衣冠葬(의관장)으로 장례 거행함에 있어 강원감사가 주관하여 묘소를 조영토
록 할 것을 계청한 바 광해군께서는 계청대로 시행할 것을 하명하였다. 이리하여 여우산(군량봉)
선영하에 장군을 의관장으로 장례하였다.

--이와 같이 시체없는 빈무덤이라 하여 여우산을 “빈장산”이라 부르게 되었고 또한 그 앞 내를 빈
장개울이라 부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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