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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에 정착한 실향민의 아들 이철우는 늦깎이 대학생으로 서울 시립대에 입학한다. 하지만 입학 후 곧 정치범으로 감옥 생활을 시작하는데…….
하루도 빼놓지 않고 찾아왔던 아내와의 옥중 러브 스토리, 한글을 모르는 소년수와의 우정, 어머니의 손에 끼워준 졸업반지, 그리고 고향에 돌아가서 다시 한탄강 댐 반대운동에 참여하기까지의 이야기를 CBS 라디오 '공지영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에서 들어본다.
( 이하 방송 내용 )
▶ 진행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 출연 : 이철우 열린우리당 전 국회의원
- 지금은 어떤 일 하고 계세요?
지역에서 제가 관계하고 있는 정당 일을 하고요. 한탄강 댐 때문에 바쁘게 다니고 있습니다.
- 포천과 연천은 지형적으로 어떻게 다른가요?
포천과 연천은 냇가가 많아요. 한탄강 지류로 서로 맺어져있어서 이웃 동네로 같이 살아왔죠.
- "한탄강이 나의 탯줄"이라고 표현하셨는데요.
우리 국토를 하나의 생명체로 보면 한탄강은 관상동맥이에요. 관상동맥은 심장에 있는 핏줄이라 작거든요. 하지만 그 관상동맥이 막히면 사람은 죽습니다. 그것처럼 한탄강은 항상 각축장이고 전쟁터였어요. 한탄강에 문제가 생기고 한탄강 주민들이 아프면 우리나라는 아픔과 통증을 호소했어요. 한탄강은 그만큼 역사적이고 운명적인 강이에요. 대표적으로는 6.25를 들 수 있죠. 한탄강을 사이에 두고 엄청난 포성이 오갔고, 많은 실향민들이 거기서 살고 있죠. 그리고 임진왜란이든 삼국시대든 한탄강 주변에는 전쟁과 아픔의 역사가 새겨져 있어요.
- 예전에 큰 물난리가 난 적이 있죠?
네. 1996년에서 1999년 사이에 큰 피해를 입었는데, 당시엔 한탄강에 연천댐이 있었어요. 제 표현대로라면 관상동맥이 막혔던 건데, 그 댐이 터지면서 물난리가 났던 거예요. 근데 지금은 다 철거해서 괜찮습니다.
- 어린 시절 한탄강 주변의 모습은 어땠나요?
강이 삶의 모든 것이었죠. 거기서 물장구 치고, 꿈도 꾸고... 모든 상상력이 그 안에 있었죠.
- 아버님이 철원에서 월남한 실향민이었다고요?
네. 아버지가 철원 지역에 사시면서 청년 시절에 기독교를 전도 받으셨어요. 그러다가 해방 되면서 월남을 하셨어요. 6.25 때 가평 쪽에서 피난을 하시다가 7년 동안 군대생활 하시면서 저를 홍천에서 낳으셨어요. 그 후 제가 돌 때 포천에 오셔서 농사지으시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사셨죠.
- "처음 라면을 먹어본 날을 잊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요?
저는 오지에 살아서 읍내에 나가야 라면 구경을 할 수 있었어요. 처음으로 라면을 먹은 건 초등학교 3학년 때였는데요. 6.25 때 헤어진 고모를 찾게 돼서 새로 호적에 등록하러 철원에 가야 했어요. 그때 아버지가 저를 데려가셨는데, 점심 때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서 라면을 하나만 시켜주시더라고요. 어떤 할머니가 양은냄비에 끓여주는 라면이었는데, 지금도 그 맛은 못 잊어요. 저만 라면을 시켜주시고 아버지는 보리차만 드셨어요.
- 어릴 때 꿈이 유정회 국회의원이었다고요?
어렸을 때부터 정치에 관심이 많았어요. 동네 뒷산에 올라가서 가난한 농촌의 모습을 보면서 잘 사는 마을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제가 6학년 올라가던 해에 마을에 처음으로 전기가 들어왔어요. 점화식을 하는 날 국회의원이며 군수, 군악대가 다 왔는데요. 깜깜하던 마을이 군악대의 팡파르가 울리면서 휘황찬란해지는 거예요. 충격적이었죠. 그 가운데 국회의원이 서있는 거예요. 그걸 보고 국회의원이 되면 좋은 일 많이 할 수 있겠구나 싶었죠. 당시만 해도 선출로 국회의원이 되려면 부자에다가 힘이 세야 했는데, 신문에서 보니 선생님이나 교수를 하다가 유정회로 들어오는 경우가 있더라고요. 지금으로 치면 비례대표랑 비슷하죠. 그래서 열심히 살다가 나중에 유정회가 되어 고향에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꿈을 꿨어요.
- 중학교 때 인사 구호가 '유신'이었다고요?
저희 지역이 최전방이라 군사적인 면이 더 강했던 것 같아요. 중학교 때 교장 선생님이 새로 오셨는데 갑자기 구호를 유신으로 하자고 말씀하시더라고요. 그 후로 거수경례에 유신을 외치면서 학교생활을 했죠. 나중에 대학 와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친구들이 딴 세상에서 살았다고 하더라고요.
- "고 3때 사춘기가 와서 성적인 관심 증대로 성적이 급락했다."고 하던데요? (웃음)
하하. 공부 못한 핑계인데요. 사춘기가 좀 늦게 왔어요. 사춘기는 벼락 같이 오는 것 같아요. 남들은 방황 다 끝내고 공부할 때 저는 방황을 시작했어요.
- 언제 군 입대를 하셨나요?
79년에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동안 재수한다면서 놀았어요. 근데 우리 동네는 전방 지역이기 때문에 대학을 안 가면 대부분 지역에서 지역 방위를 받아요. 그래서 14개월 동안 지역에서 군대 생활을 마쳤어요.
- 그 후 대학 입학식날 직장에서 번 돈으로 양복을 맞춰 입고 갔다고요?
서울에 올라와서 의류업체에서 포장 일을 했어요. 근데 그때도 철이 없었는지 월급 타면 옷을 샀나봐요. 그래서 양복을 맞춰놓고 그냥 놔뒀다가 24살에 대학에 합격하면서 입학식날 입고 갔어요. 나름대로 치장도 하고, 옆집에서 카메라도 빌리고, 부모님도 오시고. 근데 가보니까 저만 부모님 모시고, 양복을 입고 왔더라고요. 굉장히 쑥스러웠어요.
- 84년에 입학했는데 졸업은 2001년에 하셨네요?
대학 다니는 내내 책을 미친 듯이 읽었어요. 밥 먹는 시간 빼곤 책만 읽었죠. 시골에 살면서 그런 걸 잘 못 접했고, 광주라는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지금까지 내가 보아온 세상은 반쪽이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나머지 반쪽 세상에 대한 갈구로 미친 듯이 책을 읽게 됐죠. 그러다가 책만 읽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서 대학 3학년 때 학생운동에 뛰어들게 됐어요. 늦게 배운 도둑질이 밤새는 줄 모른다고 졸업에는 신경을 안 썼죠.
- 감옥에는 얼마나 계셨나요?
처음엔 6개월 집행유예로 나왔고요. 그 후 4년 뒤에 4년을 더 살았어요. 감옥을 두 번 살고 나니까 2000년이 된 거죠. 그래서 남은 한 학기를 열심히 다녀서 졸업을 했어요.
- 사모님과는 어떻게 만나셨나요?
같은 과 1년 후배였는데요. 신입생 중에 참한 여학생이 있어서 1년 정도 마음속에 담아두고 있다가 고백을 했죠.
- 사모님의 면회 방법이 굉장히 독특했다고 하던데요?
처음 감옥에 갔을 땐 매일 오는 걸로 유명했어요. 제가 서울 구치소에 살았는데 그 친구 집이 안양 쪽이라 매일 구치소에 들렀다가 학교에 갔죠. 그렇게 헌신적이었어요. 그리고 저는 매일 편지를 썼고요. 면회실에서 깊은 얘기를 나누지 못하고, 또 다시 헤어져야 하는 간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하루도 안 빼고 편지를 썼어요. 그리고 그때만 해도 정치범들이나 양심수들에겐 특별면회란 게 있었는데요. 제가 좋아하는 복숭아를 몰래 주머니에 넣고 들어오면 교도관들 눈감아주는 사이에 나눠먹었던 일도 생각나네요.
- 감옥에서 만난 소년수 용선이의 이야기 좀 해주세요.
제가 안양 교도소에 있을 때였는데요. 어린 소년이 있는데 자꾸 사람들한테 맞더라고요. 그 애가 용선이었는데, 폭행치사로 들어왔다고 하더라고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중학교 애들끼리 초등학생 한 명을 때렸는데, 그 아이가 죽었대요. 그래서 다 경찰서에 잡혀갔는데, 어느 순간 나머지 애들은 다 나가고 자기만 혼자 남아있더래요. 그래서 자기가 주범이 돼서 감옥에 오게 된 거죠. 용선이는 말도 잘 못하고, 한글도 몰랐어요, 거기서 해장국 사준 거 먹고, 뭔가 찍고, 여기로 왔다는 거예요. 와보니까 자기가 폭행치사가 된 거죠. 그 얘기를 들으니 유전무죄 무전유죄가 떠오르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탄원서를 작성해서 법원에 내줬어요.
그 후에 저는 김천이라는 소년 교도소로 이감을 가게 됐어요. 근데 어느 날 낯선 소년수가 달려와서 인사하더라고요. 보니까 용선이였어요. 걔는 실형을 받고 온 거죠. 근데 거기 와서도 계속 왕따를 당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아이의 후견인이 되어주려고 노력했어요.
근데 얘는 글씨를 모르니까 모든 불이익을 당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교도관에서 사정을 해서 하루에 한 시간씩 용선이에게 한글을 가르쳐줬어요. 근데 도저히 이해를 못 하는 거예요. 박용선 이름을 쓰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 그렸다가 그 다음날이 되면 또 못 쓰는 거예요. 그런 걸 몇 개월 반복했죠. 때론 맛있는 거 사주면서 달래기도 하고, 때로는 윽박지르기도 했는데 그래도 안 되더라고요. 그러던 어느 날 제가 이런 얘기를 했어요. "밖에 나가서 나를 만나려면 숫자랑 글자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전화번호랑 주소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니까 그 다음 날부터는 한글 배우는 게 완전히 달라지더라고요. 그래서 6개월쯤 됐을 때 용선이가 한글을 깨우쳤어요. 자기도 자랑스러워하더라고요. 그 후에 형기를 다 마치고 나와서 전화 연락이 왔기에 제가 속초로 찾아가서 만났죠.
- 어떻게 살고 있던가요?
속초의 건축 공사장에 다니고 있는데, 차라리 감옥에 사는 게 낫겠다 싶더라고요. 머리는 산발을 하고, 무척 지저분한 모습이었어요. 그래서 동네 이발소에 데려가서 이발 시키고, 목욕탕 보내고, 옷 갈아입히고, 밥 사 먹이고, 용선이가 노래방 좋아해서 노래방 가서 같이 노래를 불렀어요. 그래도 용선이가 한글을 깨우쳤기 때문에 연락도 가능했던 거고, 이젠 의사 표현도 곧잘 해요.
- 고향에 내려와서 국회의원에 출마하기까지 어떤 활동을 하셨나요?
96년 11월에 출소했는데, 앞으로는 농사짓고, 교회에서 청소년들과 함께 신앙생활 하면서 살겠다, 남 도와주진 못할망정 남 속 썩이진 않고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물론 저는 사회의 커다란 이슈 때문에 나름대로는 명분을 갖고 한 거지만 아내나 가족들을 너무 힘들게 해서 이제는 소박하게 살면서 이웃에게 도움이 되자고 마음먹었어요. 인생의 전반전까지는 좌충우돌에 열병을 앓았지만 후반전엔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고향에 왔던 거죠. 근데 저를 가만히 놔두질 않더라고요.(웃음) 제 딸이 다니던 초등학교가 폐교 위기에 놓인 거예요. 이런 소규모 학교를 다 죽여 버리면 농촌 교육을 어떻게 감당하겠어요. 그리고 설령 없애더라도 천천히 지역 주민들 이야기도 들어가면서 없애야 한다고 생각해서 부모님들과 함께 반대 운동을 했어요. 지역에 있는 작은 학교 부모님들이 다 규합하고, 나중엔 전국적으로도 다 규합하게 돼서 결국 정부로부터 통폐합 정책을 철회한다는 얘기를 받아냈죠.
- 그 여세를 몰아 출마하신 건가요?
그 일이 끝나고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는데요. 당시 한탄강에 제일 화두였어요. 오염이 심했거든요. 그래서 한탄강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을 만들었어요. 근데 어느 날 한탄강에 댐이 들어온다는 정부 정책이 발표된 거예요. 그래서 댐 들어오는 걸 막기 위해 지역 사람들끼리 힘을 모아서 지금까지 7년째 그 일을 하고 있어요. 때로는 그 작은 지역에서 1만 명씩 모여서 집회를 했어요. 학교 간 아이들과 환자 빼고는 다 모였다고 할 정도였죠. 그렇게 지역사회 운동을 하면서 2004년 총선 때 출마했다가 우연찮게 당선됐죠.
- 왜 한탄강 댐을 반대하시나요?
이번에 평창이나 인제에서 일어난 수해는 산골짜기 수해였어요. 댐하고는 관계가 없어요. 근데 수해가 났을 때 '댐만 있었으면 괜찮았다'고 하면 간편하잖아요. 국민들에게 쉬운 논리가 먹히거든요. 근데 댐은 하류의 문제지, 상류의 문제가 아니에요. 이번에 강원도 지역의 수해는 댐과는 관련 없는데, 정부에서는 단순하게 댐이 모든 것의 치유책인 양 말하고 있어요. 그건 잘못된 거예요. 제가 댐 자체를 반대하는 건 아니에요. 타당성이 있느냐 없느냐에 대한 사회적 공론화가 필요한 거죠. 꼭 필요한 곳엔 댐을 세워야 하지만 댐을 지어서 이익을 얻는 사람 입장에서 댐을 세우면 국가 예산도 낭비하고, 나아가 그 댐이 여러 가지 악영향을 미치게 돼요. 기본적으로 가는 물길을 막으면 문제가 생기는 거예요.
- 어머니의 은반지에 얽힌 사연이 있다고 하던데요?
어머니에게 두 개의 반지가 있었어요. 하나는 저의 보잘 것 없는 은반지이고, 하나는 육사 졸업할 때 생도들이 해준 루비 반지가 있어요. 두 개는 비교도 안 되죠. 근데 감옥에 면회 오셔서 탁자에 주름진 손을 올려놓으시는데, 그 두 개의 반지가 눈에 확 들어오는 거예요. 반지를 나란히 끼고 있는 어머니 손을 보는 순간 많은 느낌이 오더라고요. 저 은반지와 루비 반지가 이 사회의 이데올로기나 여러 가지 차이를 말하는데, 우리 어머니 손에서는 모두 똑같은 귀중한 반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두 개의 반지에 이데올로기가 있어도 어머니 손 안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걸 보면서 우리에겐 이데올로기보다 더 소중한 게 있다는 걸 깨닫게 됐죠. 저희 어머니 손은 대단한 손이에요. 수십 년 동안 수천 평의 밭을 다 일구셨고, 지금도 천 평 넘는 밭을 혼자 다 매세요.
- 앞으로의 계획은?
한국은 유난히 갈등과 스트레스도 많은 사회인데요. 저는 남북 갈등이나 이념 갈등, 지역 갈등이 없는 우리나라가 되기 위해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개인적으로는 지금이 정치적인 감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또 다른 10년을 위한 열병의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외롭지만 내면의 공부를 통해 새로운 10년을 살아가는 에너지를 충전하고 싶습니다.
▶ 진행 : 공지영
▶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월~토 오후 4시 5분~5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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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노컷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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