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이 이런식으로 주식시장과 미국 월가 중심의 금융자본에 과도하게 의존하다가는 자칫 '아시아판 남미경제국가'로 전락할 수 있다."
개발도상국과 발전과 체제전환국가의 구조조정 전문가인 데이비드 엘러만 미국 캘리포니아대 교수(경제학)가 최근 방한해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회와의 간담회에서 이런 경고를 던졌다. 그는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조지프 스티글리츠 미국 콜럼비아대 교수가 세계은행 부총재로 재직할 때 수석자문연구원을 맡으면서 한국의 외환위기 전후 과정을 세심하게 관찰한 경험이 있다.
-지난 1998년 방문 했을 때와 지금 한국 경제 사이의 가장 큰 차이가 무엇인가?
=1998년에 한국은 혼돈의 상황이었지만 IMF(국제통화기금) 체제를 거치며 한국은 자신감을 회복하게 되었다. 채무국에서 졸업을 하면서 폭풍은 지나간 것 같다. 폭풍이 한국의 전통적인 산업구조와 노사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알아보는 것이 내 방문의 목적이다. 한국은 IMF 요구를 충실하게 따라 산업과 시장구조를 영미식으로 재편해 주식시장과 주주의 권리를 강조하는 구조로 바뀌었다.
그러나 한국이 선택한 미국식 기업경영 방식은 전통적 한국의 산업구조의 특징과 장점과는 충돌한다. 고용을 유지하고, 새로운 기술을 위해 투자하는 것과 주주들을 위해 단기적으로 많은 이익을 내고, 좋은 결산보고서를 내는 방식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다수의 주주들이 단기적인 매매이익에만 관심이 있다면 기업은 인적자본의 개발이나 중장기적인 성장동력을 얻기 위한 기술투자 등과는 거리를 두게된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경험에서 두가지 전술을 고려할 수 있다. 하나는 '상향평준화(High Road)'식 접근법이다. 노동자들에게 고용의 장기적인 안정을 보장하고, 기업의 성과를 그들에게 보답하고 재투자 하는 것이다. 만약 새로운 기술이 등장해 현재 고용된 인력들의 기술이 필요없게된다면 새로운 기술을 빨리 배워 적응하게 하는 방식이다. 이는 대개 미국 기업들이 흔히 쓰는 `하향평준화(Low Road)'식 접근법과는 대조적이다. 미국 기업들의 경영상의 어려움에 직면할 경우 단기에 비용을 줄이려고 기존 노동자를 재교육시키기보다는 해고하고 노동시장에서 새로운 인력을 구하는 접근방식을 택한다.
후자는 시장기반의 접근이고, 전자는 전후 일본이나 독일식 접근방식이다. 어느쪽이 사람들에게 더 헌신적으로 일할 수 있게하겠는가? 미국의 경영자들은 스톡 옵션으로 1년에 수백만달러씩 돈을 벌면서도 노동자들에게는 "당신들을 유지하는 것보다 주가를 높게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서슴없이 말함으로써 노동자들의 회사에 대한 충성심을 떨어뜨린다. 이에 따른 피해는 단기적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나중에 현실화되면 경영진은 아예 회사를 외국으로 옮긴다던지 한다.
한국은 이렇게 서로 완전히 다름 접근법 가운데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영미식과 독일식을 비교해보면 결론적으로 미국 경제가 더 역동적이지 않은가? 일본도 일본도 '글로벌 스탠더드'로 인식되는 영미식을 따라 불황 벗어나는 과정에서 종신고용제 폐기를 선언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다.
=미국 모델의 성공과 주식시장의 좋은 성적을 동일시하면 안된다. 주식시장에서 성공은 하나의 지표일 따름이지 실제 성공을 반영한다고 볼 수 없다. 현실을 보면, 미국에서 말하는 '주주의 이익과 권리'는 궤변에 불과하다. 사실 힘은 경영자들에게 집중된다. 중소기업들이 부단히 연구개발 노력을 해 기술을 개발하면 큰 회사는 풍부한 자본으로 다른 기업들을 합병하는 시스템으로 미국은 산업을 지탱하고 있다. 즉 미국의 대기업들은 허공에 떠있는 것이다. 그들은 여기저기 합병을 추진해서 주가를 올린다. 그러나 힘은 중소기업에서 오고, 하이테크 분야에서 온다.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미국처럼 하려면, 주식시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또 미국 경제는 겉으로 보기보다 많이 병들었다. 수천억 달러에 이르는 무역적자가 그 단적의 증거의 하나이다.미국 기업들이 미국인들이 소비하는 것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한국, 일본, 중국, 유럽에서 생산된 상품을 주로 구매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정치, 국사적 강국이라는 지위로 전세계 부자들로부터 미국으로 돈을 끌어들여 경제를 지탱하고 있다. 그러나 무역적자가 감당할 수 없는 수준으로 불어날 경우 돈이 거꾸로 흐르게된다. 이렇게 되면 미국 중앙은행은 금리를 올려 돈이 못 나가게 할 것이고, 그러면 실질적으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수많은 중소기업들이 자금난에 시달리고, 결국 미국 경제가 내리막길을 치닫게 될 것이다.
독일이나 일본의 미국 따라하기 경향에 대해서는 그리 놀라워하지 않는다. 분명히 양쪽의 특성과 장점을 수렴하는 그런 경향은 존재한다. 같은 맥락에서 미국 기업이 일본식으로 변하는 예도 많이 있다. 문제는 내부의 발전구조와 어떻게 순조합을 만드느냐에 있다.
실패한 예로 무재고, 적기생산을 뜻하는 '저스트 인 타임(Just in Time)'제도를 들수 있다. 일본기업들은 오래전부터 가족적이고 우호적인 노사관계를 바탕으로 파업 등에 대비할 필요가 적어 재고도 필요가 없다. 이에 공간 비용 등을 절약하기 위해 도입한 제도가 바로 이것이다. 미국 기업들은 일본 노사관계의 이런 특징을 고려하지 않고 재고를 줄이려는 목적으로 이 제도를 앞다퉈 도입했으나,
- 최근 한국 정부도 주식시장에서 외국자본의 비중이 과도하게 높아진 데 대해 우려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자칫 잘못하면 남미화의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데.
= 물론 한국도 제 2의 아르헨티나가 될 수 있다. 이미 외환위기때 일부 그렇게 된거 아니냐. 다시 말하지만 이건 역시 상이한 제도의 특징을 임의적으로 조합하다 생긴 문제라고 본다. 금융시스템은 철저히 시장에 기반을 둔 것과 장기적 관계금융에 의존하는 두가지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한국에서는 전통적으로 기업들이 금융기관과의 우호적 장기거래관계를 통해 지속적으로 투자하고 성장하는 방식을 채택해왔다. 그러나 이제 와서는 주식시장에 기반한 금융시스템을 구축하려고 하고 있다. 97년과 98년, 태국을 비롯한 아시아 각국들의 금융위기는 시장원리에 충실한 다국적 다국적 금융자본의 존재 때문에 더더욱 전면적이고 심각한 위기로 번지게됐다.
-구체적으로 앞으로 위기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설명해달라.
=두 가지 문제를 구분해서 말하고 싶다. 하나는 외국자본이 한꺼번에 철수할 때 생길 수 있는 잠재적 위험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국자본이 한국의 주요 산업을 지배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이 두 가지의 문제가 다 존재한다. 일본의 경우에는 자본시장을 개방했지만 주요 산업에 대한 외국자본 인수가 거의 없다. 일본 정부가 자국의 주식 시장을 조심스럽게 관리하고 있으며, 지분 구조가 너무 복잡하게 얽혀 있어 외국자본이 끼어들 여지가 별로 없었다. 한국은 실험적인 상황에 있는 것 같다.
미국이 주장하는 기업지배구조가 인기있는 이유는 이게 경영자의 입장에서 보면 아주 편리하기 때문이다. 공산당은 인민의 편에서 봉사한다고 하며 자신들의 독재를 합리화 한다. 경영자들은 '주주의 종' 역할을 자임하며, 자신은 대리인에 불과하다고 강변한다. 나는 이 말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미국의 기업경영자들은 이 제도를 교묘하게 포장해 그들의 엄청난 권력을 합리화하고 있다. 일본, 독일기업에서 경영자들의 힘은 이보다 훨씬 적고 책임도 많이 진다. 독일에서는 노동자들이 참여하는 사업장평의회(Work Council) 등이 경영자들을 적절하게 감시한다. 미국기업의 경영자들은 독일보다 20배나 더 많은 임금을 받고 있지만, 일본이나 독일기업 경영자들 20배의 이익을 창출하지는 않는다.
-한국의 IMF 체제 이후 개방화정책을 꾸준히 추진해왔고 이를 지금 되돌리기도 어렵다. 공기업이나 국가 기간산업, 은행 등에 대한 지배권이 외국자본으로 넘어가는 것에 대해 현실적으로 우려하고 있지만 어떻게 풀어나갈 방법이 없다.
= 세계화 시대에 개방은 불가피하다. 새로운 기술과 아이디어를 개방해야 하고, 또 수출을 위해서는 상품시장도 개방에 대한 개방은 차원이 다르다. 칠레의 경우 최근 투기자본의 급속한 국경이동을 차단하는 제도를 만들었고, 말레이시아도 그렇다. 우리는 소유와 지배권을 포기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세계화 시대에 지속적인 성장을 구가하느냐가 관건이다. 특효약은 없지만, 이에 대한 논쟁은 '개방 아니면 봉쇄'라는 이분법적 틀을 넘어서야 한다.
-성장을 하려면 투자를 해야 한다. 그런데 투자를 하려면 축적된 자본이 취약한 한국 같은 나라에서는 외국자본에 대한 의존이 불가피하다는 의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주식시장에 들어가는 돈이 투자로 연결된다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미국 기업들이 투자재원은 주로 자체 이익에서 나온다. 두번째가 은행, 즉 저축이고, 세번째가 채권이며, 네번째가 주식시장이다. 주식 신규발행으로 끌어들이는 돈 못지 않게 배당이나 자사주 환매 등으로 나가는 돈도 엄청나다.
따라서 주식시장이 투자재원의 원천이라는 논리는 미국의 예가 뒷받침해주지 않는다. 한국의 많은 투자가 미국 증시로 가고, 또 미국 월가에서는 다시 한국에 투자한다고 했을 때, 그러는 것보다는 한국의 내부 잉여자본이 직접 한국에 투자되도록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한국의 재벌체제는 어떻게 바뀌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가.
=미국에서도 가족소유의 대기업의 역사가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 1~2세대를 지나면서, 전문경영인체제나 다수가 소유하는 공개기업으로 바뀌었다. 일본과 독일은 전쟁이 가족 소유구조를 해체하는 계기가 되었다. 독일은 법으로 공동의사결정을 채택했고, 일본의 기업문화로 공동체적 경영을 하고 있다. 거칠게 말하면, 답은 가족들의 소유·지배권을 점차 약화시키고 기업의 내부 이해관계자들의 참여가 확대되도록 하는 게 역사적 추세이다.
그래서 내가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여러 나라의 기업지배구조개선 방안의 하나로 제안하는 것이 종업원지주제(Employee Stock Ownership Plan:ESOP)이다.
-한국에서도 외환위기 거치며 미국식 종업원지주제 도입을 적극 검토해왔으나 크게 진전된 바가 없다.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한국 우리사주제도의 문제는 자사주 구매자금이 종업원들의 주머니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는 종업원지주제가 아니라 정확하게 말하면 '우리사주구입제도'을 뿐이다. 미국이나 유럽에서 시행하고 있는 종업원지주제는 회사와 종업원이 장기계약을 맺어 회사의 성과에 기여하는만큼 주주가 될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이 제도에선 노동자들이 직접 돈을 내지 않는다. 회사가 은행에서 돈을 빌려 주식을 종업원들에게 가배정한 다음, 회사가 이익이 생겨 돈을 갚으면 실제로 종업원들에게 주식을 갖게하는 제도이다. 종업원들의 회사를 위해 열심히 일하지 않으면 자신들에게 가배정된 주식을 잃을 위험이 있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회사에 헌신을 해서 성과를 내야 할 유인이 있다..
나는 이번 방문에서 한국에서도 케이티와 대우조선, 한국전력의 자회사인 한전기술 등 종업원지주제를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춘 기업들을 많이 확인했다. 이들 기업에서는 경험 많은 전문경영인들이 존재하고, 노조 역시 자율적인 경영을 위해 종업원지주제 도입에 긍적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 일부 경영전문가들은 지난해 파산한 유나이티드항공의 경우를 사례로 들어 대주주가 종업원이 될 경우에는 변화를 두려워해 기업의 의사결정이 느려질 가능성도 우려하는데.
= 좋은 의사결정을 빨리 하면 제일 좋겠으나 오래 걸려도 제대로 된 결정을 하는 것이 궁극적으로는 효율적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빨리 결정해도 그것이 충분히 구성원들의 합의를 구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쉽게 행동에 옮기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빠른 의사결정이라는 아이디어는 허상이다.
- 한국에서는 최근 비정규직 비율이 높아져 심각한 사회, 경제적 문제를 야기하고 있다. 종업원지주제가 이런 문제를 해소 또는 완화하는 데도 도움이 되는가.
= 비정규직의 증가에 따른 고용불안은 전세계적인 문제이다. 또 이미 고용시장에 안정적으로 진입한 노동자들과의 이해충돌 등 간단하게 답을 찾을 수 없는 복잡한 문제이다.
안정적이고 유연한 일자리 창출의 관점에서 다시 한번 종업원지주제를 말하고 싶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에서 하고 있는 업무의 일부분을 분사하면서 그 회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주식을 나눠주자는 것이다. 다만 이 때 장기계약을 맺어 안정적인 일감을 확보해줘야 하고, 정부도 분사와 기업설립시에 세금 혜택 등 지원에 나서야 한다. 대기업에서 일부 서비스 분야를 분사해 내는 것은 고용창출 효과와 더불어 기업가 정신에도 부합한다. 거대 기업이 모든 분야를 장악하는 것보다 주인들로 구성된 수많은 작은 기업들이 활발히 움직이는 게 경제를 더 활발하게 하지 않겠는가. 중국 격언에 '소의 꼬리보다 닭의 머리가 더 낫다'는 말이 있다.
박순빈 서수민 기자 sbpark@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