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최종철
2003/10/24(금)
환경독재의 시대에 보는 숲의 의미  

환경독재의 시대에 보는 숲의 의미  

숲은 인간이 가장 오랜동안 기대어 살던 곳이다.
우리에게 먹거리를, 쉬고 잠잘 곳을, 아름다움을 제공하던 그런 곳이다.
숲을 이루는 나무목(木)자를 보자. 하늘과 땅을 뜻하는 열십자(十)와 이 십자가 넘어지지 않토록
해 주는 여덟팔자(八)가 붙은 형상이다.
세상이 넘어지지 않도록, 없어지지 않도록, 부패하고썩어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생겨난 십자가
를 버텨주는 형상이 바로 나무인 것이다. 그 버팀목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 말이다.

우리 국민은 한때 폭압과 독재를 탓하며 유신이라는 무기를 장착한 박정희시대를 피하느라 수 많
은 사람이 고통을 겪었다. 그 폐해는 이루 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필자의 생각은 여러 가지이지
만, 세상의 모든 일에 완벽이란 있을 수 없다고 본다.
특히 정치란, 괜히 흠집내고, 괜히 싸움걸고, 이리저리 뜯어보는 사람들이 많은 선보는 장소와 하
나도 다를게 없다는 생각이며, 이런 상황에서 최대의 효과적인 일을 만들어 내는 것은 어쩌면 우
리가 생각하는 이상이고, 또 이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바로 성군이자 유능한 대통령의 모습일 것
이다.

우리 민족은 삼천리금수강산이라는 별칭을 가진 국토에서 살아왔다. 이건 어쩌면 우리 국토를 지
나치게 화려한 문구로 장식한, 작은 나라를 보는 작은 눈이 만들어낸 단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 실제 이웃의 중국이나 보다 크고 넓은 나라에는 우리와 같은 비경을 간직한 곳이 사실 수백 아
니 수천군데도 더 있다. 그럼 거긴 다이아몬드강산인가!

결코 그런 환경이나 풍치나 경관이 부러워서 이렇게 표현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과거의 정부는
특히, 박정희 대통령시절의 치산정책은 가히 살벌의 도를 넘었다.

우리나라만큼 짧은 시기에 이렇게 국토를 초록으로 만든 국가가 없다. 얼마나 잘?했으면 선진국에
서도 배우러 오고 있는가? 물론 흠집내기 좋아하는 일부의 식자(특히 학자들)은 이러한 삼림녹화
정책에도 비판적이다. 본인이 알기로 삼림녹화정책을 만들고 이를 이끌어온 분들도 지금에 와서
는 이리저리 흠잡느라 정신이 없다.
그때는 연구해서 챙기고 지금은 헐뜯어서 입지 강화하고.....
그게 학자들의 할 일인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다만 지켜보아온 필자로서는 자랄대로 자란 지금에는 나무의 소중함을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다. 바로 세상을 버텨주는 존재이기 때문인 것이다.

과거 유신을 쪼개며 찍어내기 바빴던 그시절의 정치인들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산
에가서 일좀 했으면 좋겠다.
일이란게 다름이 아니다. 바로 한일(一)자를 세워 나무(丨)가 되도록 보살폈으면 한다. 독재정치
운운했지만, 지금의 미래가 없는 환경정책과 이를 집행하는 현재의 정부는 미래를 보는 눈이 더
무서운 독재인 것 같다.
유신시대야 당시의 사람을 괴롭혔을지 모르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은 철저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래를 어떻게 준비하고 있는가!
물길을 막아 생명을 소멸시키고(갯벌매립), 나무를 없애(골프장 허가, 그린벨트개방) 국토를 다
시 옛날로 되돌리는 일에 혈안이 되고 있다.
이런 일이 바로 미래를 준비하는 현재, 우리 정부의 미래를 보는 눈이다.
수조원의 국민 재산이 없어져도 찾으려 하지 않으면서, 좀도둑은 어찌 그리 잘 잡는지. 과거의 역
사왜곡에는 그렇게 민감하면서 민족의 미래에는 왜 그리 둔감하고 인색한지 모르겠다.
바로 미래를 정권으로 망치는 환경독재시대인 것이다.

야당이란 무엇인가? 바로 들을 상징하는 들야(野)자를 머리에 이고 사는 사람들의 집합소아닌가!
그런 야당이 할 일의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삶의 터인 들을 보호하는 일은 아닌가 한다. 들에서 사
는 정치인들이 자기들의 영역인 들을 마음대로 헤치고 부셔버리니 설자리가 없는 것이다. 이러한
야당의 총재로서 당수로서 오랜세월을 버텨온 사람이 지금은 야당을 적대시 하는 자리에 앉아있
다. 이제는 자연을, 들야자를 없애고자 하는 모양이다.

한때는 들에서 살고 이제는 없앤다? 누가 이해 하겠는가! 국토는 정쟁의 이용대상이 아니다. 미래
를 준비해야할 미래세대에게 물려준 더 없이 소중한 존재인 것이다.
우리가 남의 땅을 살 수 있을까? 소련처럼 어리숙하게 남에게 자신들의 땅을 넘길 기회를 잡을 수
있을까? 우리의 땅에 우리 민족이 살아야 하는 것은 위정자들의 생명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만들어
야 하는 여건의 하나인 것이다. 왜 우리땅을 두고 떠나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왜 훈장을 반납 하고
서라도 이땅을 떠나고 싶어하는가?

바로 숲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미래를 보는 마음의 숲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국민들의 마음속에
숲이 사라져 가고 있다. 국가를 위하고 국민을 위해 매복할 장소인 국가의 숲이 사라지고 있기 때
문이다. 이 나라에는 숲을 호연지기와 배움의 터로 삼아 국정을 이끌기에 부족함이 없도록 수련
한 인물도 그럴 환경도 없다. 당연히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단순무식형의 악동들만이 끓어 넘
치는 것이다. 모두 다 자연의 대명사인 숲을 느끼고 보지 못한 탓이다. 숲에서 배울 지혜와 지식
과 순응과 겸손과 미래를 준비하는 능력을 경험하지 못한 이들이 어찌 온 국민의 미래와 철학이
담긴 숲을 다스리고 이용한다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제 환경의 소중함을 수 많은 곳에서 경험하고 있으며 그 가치를 실질적인 경제적 환금수
단으로 이용하고 있다.
한강의 조망권이 몇억을 호가하고 있으며 과천의 환경권이 수천만원에 달하고 있다. 두 가지 다
무엇이 그렇게 소중한가? 바로 숲이다.
다르다면 다를 수 있는 것이 있다. 하나는 빌딩의 숲이고 하나는 자연의 숲이다.
서울은 그야말로 빌딩의 숲에서 사람이 사는 곳이다.
한강이 제공하는 것은 바로 빌딩의 숲을 고스란히 보이게 해 주는 거울을 만들기 때문이다. 과천
은 자연의 숲을 가진 곳이다.
그곳은 거울은 없다. 그러나 마음의 거울을 깨끗이, 신체적 건강의 거울을 말끔히 만들어 주는 무
형의 거울, 자연의 울이 있다. 바로 우리는 자연의 소중함, 살아있는 숲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이 나고 힘들고 지치며 더위와 여가를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의 하나가 다름아닌 숲이다. 행락
철이면 어디서 몰려왔는지 수많은 사람들이 숲에 들어찬다. 그들은 숲의 고마움을 말없이 느끼고
즐기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주로 어디서 사는가? 다름아닌 빌딩숲이다.
아파트도 사무실도 모두 다 땅이 없어지면서 생기는 시멘트와 철골의 숲이다.
우리 인간은 결코 독성이 강한 시멘트와 자성이 넘치는 철골에 얹혀 살기 적합한 존재는 아닌 듯
하다.
바로 흙과 숲에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이다. 시간만 나면 그 소중한 집과 일터를 떠나 찾는 곳이 숲
임에 그 답이 저절로 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숲을 대하고 있는가? 그 숲을 구성하는 존재들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전하
려 해 왔는가? 좋은 나무를 보면 잘라내고 싶어한다.
욕심은 이해한다.
풍치좋은 곳이면 무조건 집한채 짓고 싶어 한다. 그 희망사항 알만하다.
그러나, 물건을 사고자 한다면 대가를 치루는 돈이 있어야 하듯, 자연을 이용하려면 자연을 이용
하는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그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들이 자연스럽게 살아가도록, 존재하도록 하는 것이다.

건물은 하우스에서 얻어낸, 우리가 키우고 보살핀 과일나무의 종자라면, 자연의 숲은 산과들에 아
무렇게나 생겨난 듯 보이는 야생화를 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과일은 경제적 대가를 지불했기에 우리 마음대로 먹고 버릴 수 있지만, 그저 자기네끼리 살아온
자연에 불쑥 손을 내밀어 내가 필요하다고 그들의 존재를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외계인이 있어, 당신의 아들딸이 보기 좋은 생물이라고 채집해 가는 경우와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부모로서 당신은 아들딸을 잃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 것인가!
인간으로서 숲과 자연을 잃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우리는 자신이 편하고 아름답게 살아가기 위해 수 많은 숲을 없애고 있다.
그리고 이번 여름 휴가에는 차를 몰고 그 멀리 숲을 찾아 헤멜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투덜댈 것이다.

“이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다 왔지? 너무 인간들이 많다. 싫다, 싫어.”
그러면서 좀더 깊은 숲으로 여러분은 이동 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숲을 깔아뭉개 만든 숲의 공동묘지인 아파트로 돌아올 것이다.
언젠가는 사라질 숲은 전혀 걱정하지 않으면서 말이다.
우리의 가슴에 진정 미래의 숲이 건강하게 자랐으면 좋겠다.

“나는 혹독하더라도 제목처럼 환경을 생사의 도구쯤으로 생각하는 시대에 살고 싶다. 환경을 유신
의 독재처럼 생각하는 그런 미래지향적인 독재자 같은 인간을 만나고 싶다.”


  이름   메일
  내용 입력창 크게
                    답변/관련 쓰기 폼메일 발송 수정/삭제     이전글 다음글         창닫기